계백장군 유적지

등록 : 2008-03-26 02:07 갱신 : 2026-01-05 11:16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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계백장군 유적지

백제 말기 성충[成忠]·흥수[興首]와 더불어 백제 3 충신으로 꼽히는 계백의 유허지로 최후의 결전장이던 황산벌과 가까운 곳에 있다. 1966년 묘를 발견할 당시, 봉분이 반 이상 붕괴되어 내광이 노출되었으며 광벽까지 일부 파손된 채 방치되어 있었는데 부적면 사람들이 지석[支石]을 안치하고 내광 회벽을 완봉한 후 봉분 둘레 47.6m, 지름 15.15m, 높이 6.5m로 복묘하였다. 1976년 5월 19일에는 봉토를 만들고 비석을 세웠다. 비석에는 전 백제계백장군지묘[傳百濟階伯將軍之墓]라고 쓰여 있다.

계백(階伯 ;?~660)은 백제의 장군이다. 554년 성왕[聖王]이 관산성[管山城]에서 전사한 뒤 백제와 신라의 관계는 매우 악화되었다. 641년 의자왕[義慈王]의 즉위이래 백제는 고구려와 제휴하면서 신라를 자주 공격했다. 그러나 고립된 신라가 당나라와 협력하여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노리면서 상황은 크게 변했다. 더욱이 의자왕의 실정으로 국내가 혼란해지고, 고구려가 연개소문의 정변 등 국내 문제로 백제와의 동맹에 소극적으로 되자 백제의 위기는 점차 현실화되었다. 결국 660년(의자왕 20) 소정방[蘇定方]과 김유신[金庾信]의 나당 연합군이 백제의 요충지인 탄현[炭峴]과 백강[白江]으로 쳐들어왔다. 이에 의자왕은 계백에게 5,000명의 결사대를 주어 이를 막게 했다. 계백은 죽기를 각오하고 출전하여 1당 100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4번을 싸워 이겼으나 백제군은 결국 중과부적으로 대패하여 계백이 전사했다. 이 황산벌전투로 백제는 비운의 종말을 맞이했으며, 계백장군은 통한을 품고 이곳에 묻혀 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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